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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파르타~
    역사 2024. 1. 17.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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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르타는 코린토스나 아르고스와 같이 순수한 도리아인으로 구성된 폴리스였으나 일반적인 정치발전과정에서

    하나의 예외적 존재였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남부에 있는 스파르타는 크기, 자원 및 역사적 과정에서 다른 폴리스들과 달랐다. 스파르타가 지배한 라코니아는 넓고 비옥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라코니아는 지역, 라케아이몬은 국가, 스파르타는 폴리스를 각각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스파르타는 동쪽과 서쪽이 산악으로 막혀 있고 천연적으로 좋은 항구가 없었음으로 외부와 직접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스파르타가 문화적으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주도적 국가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른바 서정시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BC 9세기경 스파르타는 주변의 작은 농촌들을 결집하여 폴리스로 발전했으며, 점차 라코니아에서의 지배범위를 확대해 갔다. BC 750년까지 스파르타는 소수자 독재 체제를 취하였다. 과잉 인구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시민활동보다는 무력으로 영역 확대를 꾀하게 되었다.

     

    먼저 타이게토스 산맥 서쪽의 풍요하고 비옥한 메세니아가 스파르타의 정복대상이었다. BC 8세기 전반 제1차

    메세니아 전쟁을 시작하였고, 20년간 계속된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스파르타는 메세니아를 병합했으며, 그

    주민을 노예로 만들어 노동력으로 부렸다.

    그후 BC 650년경 스파르타의 착취와 압제에 저항한 메세니아인이 펠로폰네소스의 반스파르타 세력 후원 아래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제2차 메세니아 전쟁이었다. 메세니아인의 항쟁은 끈질기고 맹렬하게 약 30년간

    계속되었으며 결국 실패 하고 말았다.

     

    그 결과 메세니아인의 토지는 몰수당하고 지도자들은 사형 또는 추방 었다.BC 7세기 중기의 시인 티르타이오스는 2차 메세니아 전쟁을 체험한 비가시인으로 그의 작품은 당시 스파르타에 대한 역사적 사료가 되고 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스파르타의 정치와 사회가 동요 하기 시작하자 스파르타는 체제 전환을 시도하게 되었고, 전쟁의 승리에

    기여한 비귀족계층은 귀족과 맞먹는 권리를 요구했고, 이 움직임이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게 되자 귀족들은 사회체제 개편에 동의하였다.

     

    군국주의 체제 성립

    스파르타의 사회체제는 개성의 자유로운 발휘를 억압하는 경향을 띠고 중산계층의 대두를 어렵게 하였다. 독특한 군국주의 체제는 문화 침체에 대한 가장 주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군국주의는 스파르타인이 라쿠니아에 침입한 이래 소수 민족으로서 오랫동안 다수의 원주민을 지배하여야 했던 건국과정과 관계가 있었다. 더욱이 두 차례의 메세니아 전쟁을 겪으면서 군국주의는 더 확고하게 제도화되었다.

     

    스파르타의 역사를 통해 내내 존속한 왕정은 특이한 이원왕정이었다. 즉 두 가문에서 각각 한 사람씩 왕을 선출하고 두 왕이 공동통치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왕은 군사 지휘권 외에는 큰 권한을 갖지 못하였다. 스파르타는 보수성과 폐쇄성을 고수하면서도 정치, 사회적 동요로 사회체제를 개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체제 개편은 전설적인 BC 9세기의 입법자 리 쿠르고스의 업적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아마도 BC 7세기 말에서 BC 6세기초에 걸쳐 수십년 동안 여러 지도자들에 의해 수행된 결과로 추정된다. 한마디로 스파르타의 사회체제 개편은 한 개인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스파르타인 전체의 개혁 의지가 표현된 것이었다.

     

    리 쿠르고스 체제

    리쿠르고스 체제는 왕정하의 귀족과두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적 제도였다.

    이 체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5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시민생활을 지배하는 규칙, 특히 청소년 훈련에 관한 규칙이 있었다. 이 규칙에 따르면 남아는 7세부터 국가가 양육책임을 지며 14세에서 21세까지는 연령별로 집단을 조직하여 훈련을 실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경제적 소비를 억제하였다. 예를 들면 건축 도구로 도끼와 톱만을 사용해야 한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스파르타인의 미덕은 절약근검이었다. 셋째, 토지 재분배였다. 시민에 대한 토지분배가 법제화되었다. 넷째, 육군을 창설하였다. 장차 스파르타 육군은 최강의 군대로서 명성을 떨치고 BC 6세기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다섯째, 정치제도를 재편성하였다. 이전부터의 이원왕정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귀족과두제로 편성하여 30명의 원로회의와 5명의 에포르에게 전권이 위임되었다.

     

    원로회의와 민회

    통치권은 군 지휘관인 두 왕에게 있었으나 60세 이상의 귀족 28명으로 구성된 원로회의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원로회의 의원의 임기는 종신이었다. 원로회의는 국가 행정을 감독, 자문하고 모든 법령을 기안하며 모든 중요한 소송사건의 판결을 내리는 등 대내외 문제에 관한 행정, 입법, 사법 등 광범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민회는 원로회의에 안을 인준 혹은 거부 했으며 모든 관리들을 선출하였다. 전쟁과 평화, 동맹과 조약 같은 국가

    중대사는 민회의 표결로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민회의 회원 자격은 중무장 보병으로 복무할 만한 재력이있는 30세 이상의 남자 시민에게만 한정되었다. 이것은 다른 폴리스에서 민회를 전시민에게 개방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에포르

    과두제에서 최고 행정권원은 왕에게 있지 않고, 왕권을 견제하고 왕보다도 더 큰 권한을 가진 다섯명의 에포르에게 있었다. 감독관을 뜻하는 에포르는 원로회의와 민회를 주재하고 시민생활을 검열할 뿐 아니라 대외관계, 군사문제,노예관장, 국가재정, 교육 등에 관한 권한 및 입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그들은 또한 신생아의 양육 여부를 결정하였, 신탁이 흉조를 나타낼 때에는 왕까지도 폐위시킬 수 있었다.

     

    에포르의 권한은 점차 확대되었으며, 원로회의 지지를 받는 경우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에포르는 민회에서 1년 임기로 선출되었지만 제한없이 연임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는 매우 효율적이었다. 스파르타의 정치적 안정과 스파르타 시민의 헌신적 봉사는 많은 다른 그리스인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스파르타는 BC 500년경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중심 국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역사에서 주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스파르타의 사회

    리쿠르고스 개혁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사회질서의 기본 특징은 엄격히 규정된 계급제도에 있었다. 각 계급은 국가를 위한 봉사에서 특별히 규정된 책무를 지게 되어 있었다. 스파르타의 인구는 대체로 세 신분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계급간 이동은 거의 없었다. 매우 드물게 노예계급이 해방되는 일이 있었지만 시민권은 부여 되지 않았다.

     

    사회 계급

    가장 중요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계급은 전체 주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스파르타 시민이었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스파르타 시민은 라코니아 지역을 정복한 원래의 정복자들의 후손으로 지배계급이며 귀족이었다. 약 1만 명 정도에 달하는 이 계급만이 정치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 계급은 가장 비옥한 농토를 차지했으며, 농업 이외의 다른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다. 시민의 의무는 자기 땅에서 나는 일정한 생산을 유지하는 것과 장기간 군복무를 해야 하는 두가지였다. 그러나 토지 경작은 전적으로 노예들이 했으며, 스파르타 시민계급은 오로지 군사와 정치에만 관계하였다. 스파르타 시민의 의무는 다른 계급을 지배하고 외적을 방위하기 위해 일생을 군대에서 복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배계급인 스파르타 시민은 규율이 엄한 군사 의무에 얽매어 있었다.

     

    또다른 계급인 반예속적인 페리오이코이는 라코니아 일대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로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자유민으로서 지방도시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체 폴리스의 통지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이 계급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한때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은 도시의 주민이거나 스파르타 지배에 자발적으로 굴복한 선주민으로 추정된다. 페리오이코이는 군대 복무와 납세 의무를 지고 있었으나 스파르타 시민만큼 혹독한 훈련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므로 스파르타의 세 계급 중에서 상대적으로 자유스럽고 안락한 생활을 한 것은 페리오이코이였다.

     

    노예

    노예는 정복지의 원주민으로 스파르타 시민을 위해 토지 경작을 하거나 가내노동을 하는 계급이었다. 그들도 가정을 꾸밀 수 있었으며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예는 국가소유 였으므로 매매 또는 해방될 수 없었다. 그들은 국가에 의한 토지분배가 있을때 토지와 함께 스파르타인에게 배당되었다. 노예는 토지를 떠날 수 없게 되어 있었고, 착취와 탄압의 대상이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항상 반란의 기운이 있었다. 반란의 혐의를 받는 노예는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스파르타의 시민 생활

    스파르타의 사회체제는 거의 변화되지 않고 2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이 체제에서 스파르타 시민은 상호간에 철저히 평등했으나 시민생활을 지배하는 복잡한 사회 규칙에 얽매어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배계급으로서 스파르타 시민은 국가에 대한 봉사를 최고 의무로 알고 가족생활을 희생하였다. 그들은 대단히 엄격한 규정에 따라 통제된 집단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의 일생 동안 군대생활을 했으며 개인의 취미가 희생된 강제 속에서 지냈다. 개인 각자는 강인한 정신과 튼튼한 신체를 유지하고 절약근검의 덕목을 길러야 하였다. 스파르타 시민은 국가 감독하에 신체를 단련하고 금욕과 인내 속에 공동침식을 하였다.

     

    스파르타 시민의 교육은 군사훈련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출생 후 신체검사를 받아 허약한 아이는 내다버려 죽게

    하였다. 그러나 유아 살해는 스파르타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에도 흔히 있었으며 가족수를 줄이는 방식의 하나였다. 다만 스파르타가 다른 폴리스와 다른 점은 유아 처분권이 부모가 아니라 국가에 있다는 것이었다.

    7세가 되면 아이는 같은 또래와 함께 집단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연령별로 대열을 편성하고 성장함에 따라 더욱 심한 훈련을 받았으며 운동, 체조, 사냥을 통해 신체단련을 하는 한편 단식 연습도 하였다.

     

    스파르타 시민은 20세가 되면 정규군대가 되어 60세까지 복무하였다. 국가는 그에게 일정한 토지와 그 경작을 위한 노예를 할당하였다.복무 기간에는 15명 단위로 공동급식대가 조직되었고, 공동식사를 위한 식량은 각자 자기 땅에서 나온 생산물로 충당되었다.

    30세에는 시민으로서의 동등한 권리와 모든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을 자유가 없었을 뿐 아니라 결혼 후에도 마음대로 가정생활이 허용되지 않았다. 남편은 병영을 몰래 빠져 나와 부인을 만날 궁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플루타르코스의 '리쿠르고스 전'에 따르면 남편은 낮에 부인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아이를 갖게 되는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오직 건강한 아이를 낳는 것만이 중요했으므로 엄격한 일부일처제는 2차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순결은 신성시되지 않았으며 질투는금물이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었다. 스파르타 여성도 마찬가지로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하였다. 그들의 훈련은 군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정주부가 되기 위한 것이었다. 훈련은 체육과 가정운영 기술을 발달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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